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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곳

손영철 소장 칼럼
마음이 추운 당신에게
글쓴이 관리자 (IP: *.41.191.71) 작성일 2020-08-22 23:28 조회수 379

아침 일찍 몸을 일으켜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 위 유리에는 어느새 차가운 냉기가 잔뜩 감돌았다. 덕분에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팔꿈치 피부로 먼저 알아차린다. 서늘함은 뒤로하고 된장찌개로 한가득 온기를 두둑이 채운 배에 괜스레 손을 올려본다. 이내 간단히 몸을 씻고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별안간 익숙하게 1층 버튼을 누르는 손끝 어딘가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그렇다. 겨울은 집 안 식탁 위 유리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먼저는 공기가 차졌고, 다음은 땅, 그 다음은 집, 어느새 사람이 차졌다. 겨우 집 안의 써늘함을 국 한그릇으로 물리치고 따뜻한 배를 주려 잡고 집을 나선 내게 겨울은 제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집 밖엔 온 땅에 드리운 추위를 해결 못하고 벌벌 떠는 사물이 가득인데 제 배 따뜻하다고 자족하는 나는 참 추운 사람이란 생각이 일었다.

이런 저런 반성을 밟으며 향한 곳은 내 상담실이다. 벌써 20년차로 접어드는 상담인생 동안 참 많은 내담자를 만났다. 새삼 그들도 추위를 피해 나를 찾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말이 차가워서, 사회가 차가워서,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본인의 마음이 차가워서, 혹은 지지리도 인생이 춥고 추워 몸을 녹여볼까 손 싶은 마음에 나를 찾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난로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스스로 논리를 수정할 필요를 느낀다. 그들의 한기는 고작 뿜어내는 열을 받아 녹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주 얼어버렸다. 아주 왜곡되고 변형된 어떤 형태로 꽁꽁 얼어붙었다. 이미 이리저리 뒤틀린 정서와 심리 상태 그대로 얼어버린 사람에게 고작 몇 마디 위로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진지한 조롱 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담은 무엇이고, 그들에게 나는 무엇일까.

원론적인 얘기를 해보고자 다시 묻는다. 상담은 무엇일까. 정형화된 정의를 넘어 나만의 정의를 갖고자 지난 세월 부단히 애썼지만 녹록하지 않다. 상담의 한자어는 서로상(相), 말씀담(談)이다. 곧 서로 말을 나누는 것이 상담이다. 그렇다면 상담의 영역은 우리의 일상 일반으로 확대된다. 우리네 삶은 셀 수 없이 많은 대화로 이뤄져 있음과 동시에 곧 미시적 상담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아침에 학교 가기 전 무슨 옷을 입고 나갈지에 대해 엄마와 의견을 주고받는 것부터, 점심식사 메뉴로 무엇을 선택할지 친구와 의견을 주고받는 아주 작은 의사 결정 등의 행위 일체가 미시적 상담이란 말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우리는 메뉴 선택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더러 상담이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같은 광의의 상담을 다소 한정할 필요가 있다. 본인이 이야기하려는 협의의 상담, 혹은 전문적 상담이란 ‘목적’을 달성하고자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설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담은 ‘What’, ‘Who’, ‘How’로 응축된다. 주변의 조언만으로 이같은 설계가 충실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다시 말해 당신이 겪는 삶의 고민이 미시적 상담으로 충분히 해결되지 않을 때 당신에겐 전문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대학상담이라던가 진로 상담의 경우가 그러하다. 대학을 가기 위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고, 일정은 어떻게 관리할 것이며,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작성하는 것이 유리한지 상담을 받는 것 말이다. 이 도식을 심리 상담에 그대로 가져와보면, 심리 상담의 목적에 해당하는 것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다. 또한 내담자 ‘본인’이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상담사와의 상담을 통해 그 과정을 설계하고 돕는 행위, 그것이 심리 상담사의 역할이다. 

  예서 ‘목적’에 해당하는 것은 내담자가 치유하길 원하는 질병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 목적이 늘 올바로 설정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그렇지가 않다. 때로 내담자의 현실적 문제 인식이 상담사의 문제 인식과 늘 일치하는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한 내담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직장 상사에게 쉽게 휘둘리며 의사 표현을 똑바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다고 토로하는 것이다. 이 내담자가 설정한 목적은 상사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 상사 앞에서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 작은 목표가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현상일 뿐 본질적 목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나는 내담자와 여러 회차에 걸쳐 해당 내담자의 성장 과정, 가정 배경, 사회 생활을 듣고 다각도로 분석함으로써 여러 현상의 근원에 해당하는 본질을 찾아야 했다. 이후 진행된 상담을 통해 해당 내담자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가 가진 권위를 심히 두려워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사에 대한 두려움은 내담자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데에서 보인 반응과 비슷한 것이었으며,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는 상사보다 더욱 최초의 것이었다. 그후 내담자는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직면하고 해결해 가는 가운데 상사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상담사는 내담자가 토로하는 현상을 통해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나’, 즉 내담자 본인이라는 사실이다.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내담자 본인이다.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에 상담사를 찾은 것이 아닌가. 상담사는 내담자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계획하며,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동기를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도움을 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결코 내가 아버지를 직접 대면해서 딸에게 잘하라던가 하는 등의 직접적 문제 개입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내담자가 올바른 문제 해결을 소망한다면 전적으로 상담사에게 의지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 대목에서 내담자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할 책임감이 부여된다. 학원에서 수업만 듣는다고 성적이 상승할리 만무하며, 코치가 아무리 열심히 요령을 알려줘봐야 선수가 훈련을 게을리하면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음에 무슨 부연이 필요하겠는가. 물론 훌륭한 상담가는 문제 해결 방법론과 더불어 내담자에게 변화의 의지를 갖도록 애써야하지만, 여전히 문제 해결의 열쇠는 내담자가 쥐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다. 내담자가 문제 인식도 똑바로 했고, 고치고자 하는 의지도 충만한데 무엇을 해야할지 당최 모르면 무슨 소용이랴. 내담자와의 대담을 통해 ‘무엇’을 찾아가는 과정이 상담사의 핵심 역할이다. 상담사는 내담자와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많은 내용을 듣는다. 하지만 내담자 본인은 삶의 이런 저런 배경과 사건에 대해 아무런 상관 관계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발화할 따름이다. 이렇듯 내담자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 삶의 다양한 변곡점들 간의 심리적 인과관계, 혹은 상관관계를 상담사가 심리적으로 분석하고 발견함으로써 질병의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 상담사의 기본 자질이다. 이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다시 의문에 봉착한다. 정말 이게 상담의 전부라 할 수 있을까? 내담자에게 문제 해결의 주체임을 알리고, 문제 해결 목적을 합의하고, 그것을 타개하고자 수차례의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상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중요해도 한참 중요한 것이 결여된 듯 느껴지는 공허한 나의 정의(定義)가 여전히 썩 불편하다.

상담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딘가 더 을씨년스럽다. 아마도 차갑게 가라앉은 내면의 이야기를 온종일 들은 탓에 덩달아 내게도 전해진 한기 때문이리라. 그때였다. 어리석은 내게 불현듯 작은 깨달음이 하나 스친다. 그것은 아침 출근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끝에 감돈 차가운 냉기에 관한 것이다. 한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 순간 존재했던 것은 차가운 버튼과, 차가움을 인식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아픈 사람은 많지만 같이 아파해줄 사람이 많지 않은 현실이다. 혹자들에게 차가운 버튼은 그저 겨울철 수많은 짜증거리 중 하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마음이 추운 사람들을 그저 사회의 장애요소로 치부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가히 공감불능의 시대다. 영어에선 'Sympathy'와 'Empathy'를 구별한다. 전자가 우리말의 '동감'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공감'에 가깝다. 타인의 심정을 이성적 차원에서 납득하는 것이 동감이라면, 공감은 상대방의 아픔을 감성적으로 함께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시적 상담에서 도저히 공감을 경험하지 못해 나를 찾아온 많은 내담자의 추위에 함께 떠는 것이 상담의 시작은 아닐까. 익히 알고있듯 사람인(人)은 두 사람이 기댄 모양을 표시한 형성자이다. 한데 이 한자를 들여다보며 자못 의아한 생각이 든다. 홀로 서 있으면 자기 몸만 건사하면 될 것을 굳이 기댐으로써 상대방의 무게까지 지탱하는 비효율이 무엇일까.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세상이 추워 나를 찾은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굳이 한 사람의 추위를 나눠 갖는 비효율성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점점 더 많은 인간적 가치가 효율성의 기준 아래 탈락되어 가는 현실 위에서 비효율적 공감의 감수성을 잃지 않고자 마음을 가다듬을 따름이다. 찬 바람이 상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