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는 백년손님’이란 말이 있죠. 저에게는 참 어색한 말입니다. 저희 장모님은 절 귀하고 어려운 손님이 아니라 ‘모자란 자식’으로 보는 것 같거든요.
맞벌이인 저희 부부는 아이들의 육아를 장모님께 부탁하고 있습니다. ‘처가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죠. 아이 둘의 육아를 맡아주시는 장모님께 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위를 손주 키우듯 대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회식이 너무 잦은 것 같네”라고 넌지시 한 마디 건넬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요즘은 “용돈을 너무 헤프게 쓴다” “양말을 거꾸로 벗어 놓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등 ‘잔소리 대마왕’이 따로 없습니다.
처남댁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장모님께선 ‘시댁 스트레스를 주는 시어머니가 되지 않겠다’며 친척들 생일이나 제사가 있을 때마다 항상 ‘조심스럽게’ 며느리 참석 여부를 물으시죠. 정작 저는 온갖 집안 행사에 ‘당연히 와야 하는 사람’입니다. 행사가 있을 때 과일이라도 챙겨가지 않으면 “빈손으로 왔느냐”며 핀잔을 주기 일쑤입니다.
씨암탉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저는 장모님의 관심이 부담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처갓집이 편치 않은 건 저 뿐인가요.
‘웰컴투 처월드!’
가정 갈등의 ‘대표선수’가 바뀌고 있다. ‘시월드’로 표현되는 ‘고부 갈등’ 대신 처갓집과 사위 간 불편한 관계를 뜻하는 ‘장서 갈등’이 점점 늘고 있다. 올해 2월 재혼정보회사 온리-유와 결혼정보업체 비에나래가 이혼 남녀 5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로 장서 갈등(10.9%)이 고부 갈등(2.3%)을 앞섰다.
장서 갈등의 급증은 일하는 여성이 늘면서 처가에서 육아와 집안일을 도맡아주는 일이 잦아지면서다. 결혼 3년차인 김정현(가명·34) 씨는 신혼집을 처갓집과 같은 아파트단지로 구했다. 맞벌이인 아내가 처음부터 “나중에 애들을 맡기려면 집은 무조건 우리 부모님 집과 가까워야 한다”고 요구해서다.
결혼 초에는 장모님이 매일같이 와 냉장고를 꽉꽉 채워놓고,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을 대신해줘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황스러운 일이 잦아졌다. 김 씨는 “속옷만 입고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장모님이 불쑥 집에 찾아와 까무러치게 놀란 적이 있다”며 “아내에게 ‘장모님이 너무 자주 오셔서 불편하다’고 말하면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웬 배부른 소리냐’고 핀잔을 듣기 일쑤”라고 말했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 중 시부모에게서 생활지원을 받는 비율은 2006년 14%에서 2016년 7.9%로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처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고 답한 부부는 17%에서 19%로 증가했다. 처가와는 점점 밀접해지고, 시댁과는 점점 거리가 생기는 셈이다.
“제 부모님은 며느리 비위를 거스를까봐 일절 뭘 요구하지 않아요. 반면 장인 장모는 제게 ‘자네, 교회는 꼭 다녀야 하네’부터 시작해 ‘보험 영업하는 친구가 있으니 계약 하나만 해 달라’는 요구까지 ‘청구서’를 끝없이 내미세요.”(결혼 5년차 박모 씨·35)
결혼 3년차인 김모 씨(33)는 “아내에게 장인 장모의 지나친 간섭을 하소연하면 아내는 늘 자기 부모님 편을 든다”며 “옛날 신파극에서 봐온 ‘며느리의 설움’이 뭔지 제대로 느끼고 있다”고 푸념했다.
여기엔 달라진 사회상이 투영돼 있다. 시어머니들은 자신들이 겪은 ‘시월드’를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인식이 커진 데다 아들 못지않게 ‘잘난 며느리’를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반면 처가에선 ‘알파걸로 키운 내 딸’이 사위에게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딸 부부를 늘 가까이에서 보면서 딸을 힘들게 하는 사위의 부족한 면을 쉽게 눈감지 못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위와 처가 간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신은숙 이혼전문 변호사는 “장서 갈등으로 이혼까지 결심한 부부들을 보면 대부분 처가에서 간섭과 관여의 선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처갓집에서 생활지원을 하더라도 자녀 부부의 가장으로서 사위가 존중받아야할 어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처가뿐 아니라 부부의 노력 역시 필요하다. 고부 갈등에서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중재하는 아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처럼 아내 또한 장서 갈등이 불거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김미영 서울가족문제상담소장은 “남편들이 처가에 불만이 생기면 비난과 질타의 어투로 이를 표현하면서 결국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며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 아내의 공감을 끌어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기(禮記) 전문가인 정병섭 성균관대 초빙교수는 “예(禮)의 핵심은 상호존중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라며 “사위의 존재를 존중하지 않고 무턱대고 못난 아들처럼 대하는 것은 아닌지 장인, 장모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출처: 동아일보 2018.06.21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